하느님에 대한 순교자들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
이를 둘러싼 한국 교회사 이야기가 감동으로 펼쳐지는 책!
이 땅에 신앙의 풀씨를 뿌린 이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 소중한 이름,
그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려면 그 사람의 장례식에 가 보라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그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순교자의 삶의 자리는 어떠했을까? 무엇이 그들의 삶을 그토록 찬연하게 빛나게 했을까?
이 책은 월간 『생활성서』에 2009년부터 5년여에 걸쳐 실렸던 「한국 천주교회사 오디세이」의 글들을 비롯해 그 안에 다 담지 못한 교회사 이야기들을 풀어 놓은 대서사시 같은 들들의 모음이다. 저자 한수산은 한국과 중국 등을 오가며 10여 년이 넘는 대장정의 여행을 통해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직접 순례하고 사료들을 수집, 연구하면서 그들의 역사적, 영성적 삶을 아름다운 필치로 기록했다.
한국천주교회의 형성기에 활약했던 이벽, 이승훈, 강완숙, 황사영, 최양업, 김대건 등 103위 성인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국내외 순교 성지를 순례하며 독자들과 나누고픈 이야기들이 저자의 감동과 교차되면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 책 『꽃보다 아름다워라, 그 이름』을 통해 어떠한 고통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신앙 선조들의 열정적인 향주삼덕(믿음, 희망, 사랑)의 삶을 배우며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성숙하고 풍요롭게 가꾸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책속에서]
바쁜 현대인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신자들이 신앙 선조들의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본받고 순교자 현양 사업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이 책을 추천합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를 지향하는 ‘신앙의 해’를 지내면서 한국천주교 신자로서, 특히 순교자 성월에 영적 독서로 읽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많은 애독 바랍니다.
-‘추천의 글’에서
그동안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기쁨들을 글로 쓰느라고 해 왔습니다. ‘겨우’라는 탄식을 숨길 수 없이, 돌아보면 부끄럽습니다. 그동안 썼던 우리 교회사에 관한 글을 여기 모아 놓고 보니 또 한 번의 겨우, 또 한 번의 탄식, 또 한 번의 부끄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제 압니다, 이건 제 글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생각하고 제가 쓰기는 했지만 지금부터 이 글은 그대의 것입니다. 제 글이 아닙니다. 바로 그대의 글이라고 아시면서 간직해 주셨으면 하는 그 마음이 저의 전부입니다.
-’책 머리에’ 에서
압록강을 뒤로하며 생각했다. 신앙의 선조들이 건넜던 그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교회사를 찾아가는 내 마음의 여로는 여기서 첫발을 내딛는다. 박해 시대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리라. 그리고 교회사에 우뚝우뚝 자리한 수많은 장소를 찾아가리라.
-20~21쪽에서
우리는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강물을 다르게 부릅니다. 위쪽을 향해 섰을 때 우리는 강물이 흘러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래쪽을 바라보고 서면 강물은 흘러간다고 합니다. 강물은 그렇게 흘러오고…… 흘러갑니다.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주문모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목숨을 잃는 순교자 최인길, 윤유일, 지황, 그들의 시신이 버려진 강물은 어디쯤이었을까요.
동대문 밖, 이라크 출신의 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해체주의 건물이 은빛으로 빛나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광희문이 있습니다. 지난날 광희문을 나선 길은 왕십리를 거쳐 지금의 한양대 동쪽이 되는 ‘살곶이 다리’를 건너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다리 부근은 서울을 오가는 경기도 쪽 사람들의 나들목이었습니다.
바로 이곳, 광희문을 거쳐 나간 세 순교자의 시신은 이쪽 어딘가에 버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중국을 오가며 신부를 맞아들였고, 신부를 지키기 위해 대신 잡혀서 죽어 간 이들의 아름답고도 눈물겨운 순교를 추억하고 기릴 장소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들의 시신마저 강물에 던져지며, 흘러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흘러온 강물은 그들의 시신을 품고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모셔 들이고 함께 생활했던 여장부 강완숙, 이 늠름한 조선의 누이 강완숙의 자취 또한 찾을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75~76쪽에서
세 소년이 신학 수업을 했던 자리는 변함없이 거기 있었다. 건물 앞의 드넓은 공원, 포르투갈의 군인으로 시인이기도 했던 ‘카모에스’의 이름을 딴 공원도 옛 모습 그대로라고 했다. 신학교로 쓰였던 건물은 5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되어 있었다. 맨 아래층에는 식당 두 개와 직업 소개소가 자리했고, 어둡고 꾀죄죄한 식당 앞에 앉아 아침부터 졸고 있는 노인 옆에서는 새장 속의 새가 끊임없이 재재거렸다. 이중 삼중으로 방범 장치가 덕지덕지한 아파트 베란다에서는 뜨거운 햇살 속에 가득 내걸린 빨래들이 ‘이것이 가난이다.’ 하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김대건 성인이, 최양업 신부가 여기서 공부를 했구나. 170여 년 전의 그들을 생각하며 옛 신학교 앞 공원을 걸었다. 김대건 성인의 동상이 서 있는 공원을 걷다가 돌아와 보니, 맞은편 여학교에서 점심시간을 맞은 소녀들이 하얀 블라우스를 빛내며 우르르 몰려나와 신학교 옆 맥도날드 가게에서 햄버거를 사 들고 돌아가는 모습이 바라보였다. 최양업도 김대건도 저랬겠지. 뭔가 먹을 것을 사러 저 거리를 달려 나가기도 했겠지.
-125~126쪽에서
박해 시대의 조선교회에서는 금욕생활을 중요한 수행의 하나로 인식했다. 당연하게 동정은 중요한 가치였다. 그러나 금욕과 동정을 지켜 낼 수도원은커녕 자신의 신앙조차도 목숨을 바쳐서만 지켜 낼 수 있던 시대였다. 이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약속한 이들이 부부이면서도 동정을 지키며 신앙의 반려로 결혼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들을 ‘동정 부부’라고 한다.
…… 옥에서 지내는 동안 조숙 베드로는 ‘아름다운 믿음의 정이 가득한 편지’를 여러 장 써 보냄으로써 읽는 이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썼다는 편지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이 부부가 산 아름답고 거룩한 삶이 땀땀이 수놓았을 아름답고 거룩한 한 줄 한 줄의 글이 무엇을 담았을까 미루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겹지 않은가.
옥에 갇힌 지 27개월, 1819년 여름. 부부는 끝내 순교한다. 권천례 데레사의 나이 서른다섯, 남편 조숙 베드로는 그보다 세 살 밑이었다.
한 달이 지나서 겨우 시신을 거둘 수 있었을 때 권 데레사의 시신은 세 번 칼을 맞은 자국이 있었지만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교우들은 권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남이관 성인의 집에 두었는데 여러 교우의 증언에 의하면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여 온 방 안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이들 부부를 “동정의 백합꽃에 순교의 종려가지를 곁들이는 행복”이라고 적었다.
-193~197쪽에서
떠난 사람이 비워 놓고 간 자리에는 언제나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이든 이별이든, 어떤 헤어짐도 마찬가지입니다. 떠난 사람의 뒤에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은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별을 겪어 본 사람들은 압니다. 홀로 남은 사람이 어떻게 그 빈자리를 사는지는 떠나보낸 사람만이 압니다. 순교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교라는 장엄한 승리의 빛에 싸여서 하느님에게 간 그분들의 뒤에는 이 세상의 티끌과 먼지 속에 남아서 살아 있는 목숨을 이어 나가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살아남았기에 그래도 또 살아야 했을 순교자 가족들의 삶을 그래서 늘 생각하곤 합니다. 살아 있어야 하는 고통을 그들은 어떻게 견뎌 냈을까. 어떻게 치러 냈을까.
영하 10도를 밑도는 추위가 이어지던 날이었습니다. 왜 많은 교회사가, 세 순교자가 마지막으로 살다가 잡혀간 곳을 죽령 교우촌으로 적으면서 진목정은 고스란히 빼놓는 것일까. 혹한을 뚫고 진목정 성지까지 내려갔던 것도 이 정리되지 않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 흐려 오는 눈길을 돌리니 나뭇가지 앙상한 숲 속으로 조그맣게 안내판 하나가 보였습니다. 이제 곧 여기에 기념성당이 선다고 하는 “목동 순교성당(하늘원) 부지”라는 안내판이었습니다. 양지바른 그곳에 숲보다 더 아름다운 성전이 들어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것 또한 순교로 하느님의 길을 따라간 그분들의 그 뜻이 아니겠습니까.
-239~240쪽에서
배교하고 풀려난 신자들이 걸어 간 그 후의 삶도 저마다 달랐다. 하나는 처절한 절망 속에서 반성과 고뇌 그리고 참회를 거쳐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하느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을 간 사람들이다. 우리의 거룩한 순교자 가운데는, 포졸들에게 잡혀서 관가로 끌려간 후 모진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끝내는 쓰러져 배교하고 풀려나지만…… 다시 신앙을 회복한 분들이 있다. 그렇게 신앙을 회복한 후 더 깊고 범접할 수 없는 믿음의 성을 쌓고 불멸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 하느님을 섬기다가 순교한 분들이다. 한 번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서 영광 속으로 걸어간 그분들이 있기에 우리 교회사는 더욱 찬연하다. 배교를 거듭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간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우리가 내포의 사도로 추앙하는 이존창이 아닐까.
-260쪽에서
이 글을 시작하며 썼던 고백을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모르면서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누군가가 있을 것을 믿었었다. 그렇지 않다면 때가 되면 피어나는 꽃을, 마구간에서 버둥거리며 태어나는 송아지를, 종일 어둡고 습기 찬 땅속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도 그랬다. 그 어떤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하루라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세례 후에야 만나게 되는 우리의 교회사는 갈피마다 감동과 숭고함으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럽던가. 그 자랑스러움은 교회사를 아롱거리며 수놓고 있는 순교자들과 내가 함께, 같은 길 위에 있다는 자랑스러움으로 이어졌습니다. 순교자들이 걸어간 한 걸음마다 감동이 그 밑에 깔리고 후광처럼 빛이 남는 교회사, 우리의 천주교회사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삶과 그 정신을 어떻게 오늘의 내 삶에 되살리고, 그분들의 정신을 따라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생각하게 했던 시간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마치 나는 환희로 엮인 사슬을 끌고 하루하루를 걸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순교자란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인가. 그 정신과 영혼은 나를 기도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바쳤는가 하는 그것은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늘 생각했습니다. 영세를 하던 첫날의 감격을 잊지 말자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에게 교회사가 가르치는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우리 교회사를 수놓는 순교자들의 위대한 영혼들과 내가 닿아 있고 그분들과 이어져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베이징 외곽의 중국 땅에서 조선 선교를 준비하며 보낼 때 쓴 일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일하면서 곧 떠날 것처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영원히 머물 것처럼 일하고, 내일 떠날 것처럼 준비하자. 이것이 우리 모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392~393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