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욕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그녀를 도우려는 마음 뒤에는 그녀와 친해지고 싶고 연애하고 싶은 욕망이 무의식 중에 도사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43쪽)
탐욕
식솔을 굶기지 않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노라고, 밤낮 일만 하는 아버지들은 변명하지요. 일 많이 해서 넉넉히 벌면, 그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거랍니다. 이런 아버지들에게 그 시간은 절대 오지 않습니다. 더 많이 일하라고 스스로를 닦달하니까요. 지금 이 순간을 잡으십시오. 여차하면 늦습니다. 내적 공허를 일로 채우려 한다는 걸, 이 남자들은 알지 못합니다. (63쪽)
슬픔
에바그리우스[…]는 내 슬픔의 종점을 알려 주지 않고, 슬픔을 슬픔으로 내버려 둡니다. 다만 하느님께 오롯이 의탁하라 권합니다. 슬픔이 잦아들게 해 주십사 기도하지 말고, 슬픔이 어찌 이리도 날카로운지, 어찌 이리도 헤어날 길 없는지, 주님께 여쭈어 보라 이릅니다. 슬픔의 무게를 스스로 저울질하지 말고, 주님께 오직 나의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내 슬픔은 겨우 조금씩 변모해 갈 것입니다. (79쪽)
분노
원망은 수도승들의 깊은 외로움에까지 파고듭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화낼 기회조차 없습니다. 그럴 때, 해묵은 원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몸이 가는 곳마다 마음 깊이 자리한 원망도 함께 따라다니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습니다. 감정을 파내 버려도 말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상처 입은 말들이 떠오르기 무섭게 다시 원망이 깨어나고 분별력도 흐려집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잠언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분노를 간직하는 이들의 행로는 죽음에 이른다지요. 이 말씀은 원망의 종점이 어딘지 보여 주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의로움의 길을 가도록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91쪽)
아케디아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불평이 여기저기서 터집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위로의 말을 아낍니다. 다만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라 요구합니다. 벅찬 가슴으로 토해 내는 이 말이 우리를 자기연민으로부터 지켜 줍니다. 더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합니다. 담대한 마음으로 자신을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부한 기교도 아니고 심리적 눈속임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언약의 정당성을 몸소 보증해 주신 성경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뿐입니다. (109쪽)
헛된 영광
한 수도승이 원로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위대한 단식가였습니다. 원로는 자기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독방 바깥에서 기도하며 기다리라 일렀지요. 그때 단식가에게 악령이 붙었습니다.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서 원로의 독방으로 뛰어들며 말했습니다. “제 고향에서라면 일주일도 너끈히 굶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배가 고파 미치겠습니다.” 원로가 맞받아쳤습니다. “고향에서 너는 사람들의 존경을 먹고 살지 않았느냐. 돌아가라, 가서 평범하게 살아라.” (133쪽)
교만
영성생활에 어느 정도 진척이 있다 싶자, 세속적 욕구에는 벌써 초연해진 듯합니다. 먹는 일에도 마음 쓸 일 없고, 울화도 분노도 저만치 사라져 갔다네요. 그걸 자랑하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탐식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가 진짜로 분노를 이겨 냈는지는 누군가 그를 신랄하게 비판할 때 드러납니다. 뭔가를 이루었다고 절대 자랑하지 마십시오. 다 극복한 줄 알았던 것들이 금세 우리를 다시 덮칩니다. 먹는 일에 마음 쓸 일 없고 이 순간 분노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볼 일입니다. (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