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Noc zpovědníka(Night of the Confessor)
현대인들이 품고 있는 신앙에 대한 고민과 혼란을 깊은 신학적 통찰로 바라본다. 불안정한 현실과 흔들리는 신앙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신앙이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고해 사제의 밤
오랜 시간을 사제로 살아온 저자는 화해의 성사를 받으러 오는 이들을 위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몇 시간씩 꼬박꼬박 시간을 냈다. 그를 찾아오는 이들 가운데 많은 이는 재세례파 신자이거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였기에 ‘영적 담소’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누군가는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사제에게 털어놓기도 했을 것이다. 저자는 학업이나 직무, 전 세계를 두루 다닌 여행이 아닌 바로 이 고해 사제로서의 경험이 자신의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몇 시간씩 좁은 고해소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늦은 밤 집에 돌아오면 사제는 쉬이 잠들지 못한다. 그들과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밤새 이어진다. 그들은 삶의 문제와 신앙에 대한 의구심, 인간의 심연에 대한 의심을 품고 개인 혹은 사회적 위기 속에서 어떻게 더 강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는지 자주 질문한다. 이 책은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나름의 답을 주려 하는 고해 사제로서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미리 말해 두자면, 이 책에 비밀 엄수의 서약으로 보호받는 고해 내용이 폭로되는 일은 없다. 저자가 나누고 싶은 것은,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는 이들, 자신의 갈등과 약함과 의심을 털어놓으면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 용서와 화해와 내적 치유를 바라는 이들의 이야기다.
작은 신앙은 가벼운 신앙이 아니다
저자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상처 입은 신앙』 등에서 침묵하는 하느님과 흔들리고 의심하는 신앙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함께 고민했다. 전작들에서 저자가 하느님의 침묵과 불신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믿음·희망·사랑으로 표현되는 인내를 요구했다면, 이 책에서는 우리의 작은 신앙을 응원한다. 예수는 “여러분이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갖고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옮겨 갈 것입니다”(마태 17,20)라고 하셨다. 이 작은 믿음은 죄스러운 부족한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작은 믿음’의 반대는 맹신에 가까운 믿음, 곧 ‘확신’과 이념에 매몰되어 더 멀리 더 깊이 보지 못해 신앙의 신비를 놓치고 마는 가벼운 믿음이라고 말한다. ‘작은 신앙’은 ‘쉬운 신앙’은 아니다. 저자는 크고 굳건한 신앙에 비해 ‘작은 신앙’은 어쩌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작은 믿음’이 때로는 ‘커다란 믿음’보다 더 많은 생명과 진리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 저자는 우리의 ‘작은 신앙’이 심겨져 뿌리를 내리고 큰 열매를 맺기를 응원한다.
불확실한 시대의 신앙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다 보면 ‘시대의 분위기’를 읽게 된다. 요즘에 신앙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라는 말은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듯 위태롭다. 불확실한 시대에 사람들은 확고하게 믿을 만할 것을 원하는 것 같다. 아니면 애초에 ‘신앙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하느님은 어떠한가? 숨어 계신 하느님을 탐구하고, 침묵하는 하느님을 인내하기에는 현대인들이 기다려 줄 것 같지 않다. 이 책은 현대인들이 품고 있는 고민, 신앙에 대한 생각, 변해 가는 세상에서 그들이 느끼는 혼란 등을 깊은 신학적 통찰로 바라본다. 종교가 어떤 답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대신 차분하게 나의 신앙, 우리의 신앙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책 속에서]
나는 세속적 낙관주의와 ‘독실한’ 낙관주의를 모두 거부한다. 둘 다 순진하고 피상적이며, 선과 옳음에 관한 우리의 제한적 전망과 계획과 인식의 틀에 미래를, 그리고 하느님까지도 끼워 맞추려 하는 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장차 올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준비된 마음가짐과 개방성이지만, 이러한 어림짐작 뒤에는 결국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무엇이 최고인지를 미리 알고 있다는 건방진 억측의 냄새가 풍긴다. 세속적 낙관주의(‘진보’를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계몽주의 신앙)의 순진함과 그 실패에 관한 글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나는 그보다는 ‘종교적 낙관주의’에 더욱 반대하는 견해다. 속임수 같은 ‘하느님과의 흥정’ 가능성과 사람들의 불안을 활용하여 복잡한 문제들에 지나치게 단순화된 ‘신실한’ 대답들을 제시하는 안일한 신앙 말이다(16쪽).
예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만 있으면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는 것, 유례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을 이루리라고 진정 약속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업적’이나 ‘기적’의 문제가 아니며, 선풍적 흐름을 무턱대고 추종하는 이들이 기대하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도 아니다. 신앙의 가장 급진적인 표현, 곧 정말 터무니없고 불가능한 것, 이 세상의 눈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미친 것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 그보다는 복수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것, 남이 나에게 나쁜 짓을 했을 때 “이웃을 사랑”하거나 “다른 뺨을 내미는” 것, 나만을 위해 재어 놓을 수 있는 것을 내어 주는 것,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더욱 후하게 베푸는 것, 다른 사람들이 행복한 삶의 필수 조건으로 여기는 것을 ‘하느님 나라를 위해’ 포기하는 것이 여기 속한다(23쪽).
신앙은 어떤 구체적인 ‘신조’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 변화 없이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진정한 살아 있는 신앙은, 회심의 순간 ‘하느님의 지위’에서 벗어났으나 다시 그 지위를 찾으려 끊임없이 애쓰는 ‘나’와 벌이는 영원한 싸움이다. 신학에서 말하는 ‘죄’란 단순히 ‘잘못’이나 ‘도덕률의 위반’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의 ‘나’가 그 잃어버린 지위를 되찾기 위해 다시 발버둥 치는 행위를 말한다. 죄란 살아 계신 하느님, 곧 ‘절대적 너’를 거스르는 행위로서, 회심을 통해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과 초점에 모셔 왔다가 이제는 다시 그분께 그 지위를 부정하는 것을 가리킨다(109~110쪽).
1 고해 사제의 밤
2 저희에게 작은 믿음을 주소서
3 불가능한 것들의 나라가 오시며
4 어렴풋한 현존
5 진중한 신앙
6 믿음이 있는 과학자의 고달픔
7 하느님이 아니라는 기쁨
8 다시, 여기
9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토끼
10 하느님은 아신다
11 시야 안에 살아가기
12 폭력이다!
13 요나의 표징
14 이 저녁의 기도
15 사라의 웃음
16 원기를 회복하는 그리스도교
주
글쓴이 토마시 할리크
1948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 카를 대학에서 사회학과 철학,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산 정권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면서, 1978년 동독에서 비밀리에 사제 서품을 받고 지하 교회에서 활동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 정권 붕괴 후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외부 자문단으로 일했고, 체코 주교회의 총대리로 봉직했다.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교황청 비신자대화평의회(현 문화평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에서 실천신학 교수 자격증을 취득했다.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하버드 대학 등 세계 여러 대학에서 초빙 교수를 지냈고, 현재 프라하 카를 대학 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저서들은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종교 간 대화, 저술 및 교육 활동, 영적 자유와 인권 보호 증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 2010년 로마노 과르디니 상 등 여러 저명한 상을 수상했다.
옮긴이 최문희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와 성균관대학교 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번역실에서 일했으며, 평화방송 번역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하느님의 구두』(솔출판사 2007), 『샤갈의 다프니스와 클로에』(공역, 세미콜론 2008), 『성·권력·교회』(분도출판사 2011), 『참행복의 비밀』(분도출판사 2012), 『벗어나십시오』(분도출판사 2014)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분도출판사 2016) 등이 있다.